평론 - 조새미


금속을 두드리고 땜을 해서 만든 21세기의 타임머신
주미화의 Layer 시리즈에 관하여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Joo Mi Hwa's Layer



주미화의 작업은 금속으로 무엇인가 담을 수 있는 사물을 제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엇인가 담을 수 있는 사물의 제작은 공간에 개입하는 행위이다. 작게는 그릇이, 확장하면 건축이 된다. 주미화가 금속판으로 공간을 분할, 구축하는 행위는 바구니 짜기 장인이 방사형으로 공간을 확장해나가는 것 보다는 건축가가 벽으로 공간을 분할하는 것과 닮았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 환경에서 그린 밑그림을 토대로 두께 1 mm 의 금속판을 마름질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재단을 마친 후 작가는 그 금속판을 말아 서로 만나는 지점을 땜하고, 다시 양쪽 입구 부분을 망치질한다. 이와 같은 충격의 결과, 양쪽 입구 부분은 늘어나면서 얇아진다. 그리고 코카콜라 병처럼 중앙은 잘록하고 위아래는 넓혀진 금속 링(ring)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Layer에서 하나의 기본 단위를 만드는 과정이다.
흥미로운 점은 디지털 환경에서의 디자인을 그대로 금속 판재에 적용하게 되면 결코 처음 계획한 형태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금속판에 망치질이 가해지면서 금속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작가가 원하는 비례의 완성물을 얻기 위해서는 디지털 환경에서 마름질된 각각의 조각 크기를 실재 재료로 마름질하기 전에 다시 조정해줘야만 한다. 망치질로 인해 늘어날 부분을 감안해 양 옆으로는 3 mm 씩 줄이고, 하나의 링에 다른 링을 끼워서 땜을 하는 부분을 감안해 아래 위로는 1 mm 씩 늘려주어야 한다. 작가의 작품은 디지털 공간 안에서 완성된 밑그림에 의해서가 아니라 재조정의 과정을 거친 새로운 도면을 통해서만 원하는 비례로 완성될 수 있다. 이 숫자와의 싸움은 형태에 관한 감각 지각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필요로 한다.
이렇게 마름질이 된 각각의 금속판 조각은 땜 작업(soldering)을 통해 입체로 거듭난다. 원통과 원통이 꼭 끼워지도록 내경과 외경의 치수를 확정하고, 서로 끼워 땜을 해 나가면서 공간에 개입하는 것이다. 은을 재료로 액체를 담는 용기를 만들 경우, 레이징(raising), 플래니싱(planishing) 등의 망치질 또는 유압 프레싱(hydraulic pressing) 등의 산업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Layer의 경우는 예외이다.
 






 


주미화는 땜 이라는 숙련기술을 공간 구축을 위한 주된 방법으로 채택했다. 땜은 열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금속의 접합 방법 중의 하나로 두 피스의 금속에 균일하게 열을 가하고 그 사이에 해당 금속보다 낮은 융점을 갖는 매개체를 녹여 전체를 하나의 결정구조로 만드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숙련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효율성과 경제성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산업 현장에서 뿐 아니라 개인 공방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지점에만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은주전자 제작에 있어 주전자 몸통과 물줄기를 붙이는 작업과 같은 지점에만 적용하는 것이다.
Layer 시리즈 작품들은 일차적으로는 물, 술 등의 액체를 담는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용기를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 만드는 것은 실용성, 효율성, 경제성을 염두에 둔 산업 생산과 차별화된다. 플라스틱, 유리, 종이로 만들어진 용기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 대량생산, 소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은, 동과 같은 상대적으로 고가의 재료로 제작하는 사물을 액체를 담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는 이유로 환금적 가치의 맥락 안에서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고문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주미화의 작업을 어떤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는가? 노동집약적이며, 장인적 기술이 철저하게 개입하여, 그 노동의 과정이 없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어려운 사물을 만드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일은 과거에 어떤 일이었으며, 현재는 어떤 가치를 가지며, 그리고 미래에는 무엇일 수 있는가?
은기(銀器)를 만드는 일의 문화적 맥락을 발견하기 위해 근대 이후 은기를 산업적으로 생산했던 기억을 가진 영국의 실버스미싱(silversmithing) 전통을 언급할 수 있다. 영국은 다른 유럽의 국가에 비해 은을 재료로 생산된 용기를 좀 더 보편적으로 사랑하고 욕망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실버스미싱이라는 문화는 영국에서 대중의 기억을 통해 현재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사실 ‘은’은 수저와 장신구의 재료로, 상패, 트로피, 또는 종교적 목적을 위한 특별 커미션에도 활용되는 등 우리 일상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금속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은을 주재료로 하는 주미화의 작업은 기념과 일상 사이의 공간에서 특별한 지위를 선점하며 담론을 형성한다. 숙련된 기술의 구현, 치밀한 감각 지각적 계산, 그리고 디지털 환경에서 변용 가능한 정보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스웨덴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의 1991년 저서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로부터의 경고도 상기시킨다. 세계화, 산업화에 따른 전통적 지혜의 손실과 보존에 관한 사유는 비단 인도의 전통 마을 라다크(Ladakh)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은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용기로부터도 가능하다.
우리는 주미화의 작업을 마주하며 근대화, 산업화가 가져다주는 안락한과 편안함에 관해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도, 인간이 귀금속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욕망을 들여다볼 수도, 그리고 새로운 기술 환경에서의 미래지향적 가능성에 관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액체를 담는 용기에 관한 것 이상의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Layer는 금속판으로 구축한 작은 집이다.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그 집에서 우리는 과거에 무엇을 만들었으며, 현재 무엇을 만들고 있으며,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인간의 ‘제작’이라는 것의 의미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주미화의 작업은 금속을 두드리고 땜을 해서 만든 21세기의 타임머신인 것이다.
    
 
조새미(미술비평, 미술학박사)